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정리 == 오스만이 4번, 키예프 공국이 3번, 니케아 제국도 각각 3번, 내전으로도 3번, 우마이야 왕조가 2번, 십자군도 2번, 불가리아 제국이 1번, 사산 페르시아도 1번, 그리고 쿠트리구르 족도 1번씩 시도했다. 성공은 3번이며 그중 정공법은 1번(당연히 오스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강력한 요새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니케아 제국의 탈환은 빼기도 한다(함락이 아니니까).] 이 중에서 내전과 니케아는 애매하니까 제외하고, 공격해온 외적의 방향으로 분류하면, 역시 '''동쪽이 7번'''(오스만+우마이야+페르시아)으로 가장 많고, 북쪽이 5번(불가리아+키예프+쿠트리구르), 서쪽이 2번(십자군)이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위치 선정을 찬양할 만한 것이, 그의 선택이 아니었더라면 동방의 수도가 이미 인프라가 갖춰진 [[니코메디아]]로 그대로 갈 가능성도 꽤나 높았는데, 그렇다면 동쪽 방향의 외적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1453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일찍''' 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확률이 매우 높고, 그랬다면 세계사의 향방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거기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래는 현 불가리아 소피아인 세르디카로 가려고 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이 된 후에는 이러한 공방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말기인 1912년 1차 [[발칸 전쟁]] 때 불가리아군이 코스탄티니예 인근인 차탈자(Çatalca)까지 진격해서 위협한 적은 있으나 공방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1차세계대전 종전 후 1918년 영국군이 잠시 무혈입성하여 이스탄불에 주둔하기는한다. [[분류: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version=443, paragraph=2.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